민중음악인 정윤경과 인디음악인 시와의 ‘동행’
나도원 평론가의 기획 콘서트 ‘동행’ 네 번째 프로젝트 프리뷰
[프레시안 나도원 음악평론가]
콘서트 ‘동행’은 2012년 11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연중 기획 릴레이 콘서트이다. 2013년 4월 20일(토) 오후 4시와 7시 30분, 서울 홍대 앞 공연장 롤링홀에서 열릴 네 번째 공연의 주인공들은 ‘꽃다지’의 음악감독이며 솔로 활동을 재개한 정윤경과 인디음악 동네에서 주목받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면서 그늘진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는 시와이다. 그동안 민중음악인 중심이었던 콘서트 ‘동행’이 새로운 조합을 시도한다. 이 글은 그 특별한 동행에 대한 이야기다.
같은 세계와 다른 세대의 두 싱어송라이터, 동행에 나서다
산수유는 겨우내 입고 있던 검은 외투를 벗어내고 새 몸뚱이를 드러낸 채 노란 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2013년 4월 5일 저녁, 서울시청 앞의 풍경은 전혀 화사하지 않았다. 황사 섞인 뿌연 안개는 전날인 4월 4일에 벌어진 사건, 그러니까 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자 농성장과 분향소의 강제 철거 현장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오래된 천막과 억울한 사람들을 몰아낸 자리에는 난데없이 화단이 만들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던 꽃들도 이내 하나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찾은 정윤경의 눈에도, ‘꽃다지’ 음악감독의 눈에도 그렇게 만들어진 화단은 부끄럽게만 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첫 10년의 중반까지 우리 음악 산업은 주로 청소년 시장만을 겨냥했다. 십대는 음악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에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모여들었다가 대부분 노예로 팔려나간 ‘어린이 십자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한편에선 음악의 세분화와 세대화가 이루어졌다. 중년 세대가 문화 소비의 축으로 귀환했고, 근래에는 그들이 좋아했던 노래들을 모아 담은 주크박스 뮤지컬이 연달아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젊은 피의 수혈을 찾아보기 힘든 민중음악계엔 새로운 돌파구를 도모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그리고 어느덧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성장해온 인디음악도 성숙의 나이테를 쌓아왔다. 그래서 정윤경과 시와의 동행은 현재 음악의 단면이자 세계와 세대의 만남을 청하는 몸짓이다.
정윤경은 기억하고 위로하며 응원하는 사람이다. 그의 노래는 발끈하고 성내기에 앞서 스스로 다짐하고 주위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노래는 항상 밑을 바라보았고, 몸은 자주 밑을 찾았다. 한편, 시와의 노래는 지나간 것과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 그리고 슬픔과 아픔과 다독임을 품어왔다. 두 사람 모두 속도와 성과에 집착하는 세상을 닮지 않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 생김새도, 음성도 닮지 않았다. 어떻게 그들이 동행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이 의미를 지니는지 말해볼 참이다.
▲정윤경. ⓒ콘서트 동행 기획단 제공 |
늘 누군가와 걸어온 정윤경
정윤경의 노래 활동은 1986년까지 거슬러간다. 명동성당청년연합회 산하 노래패 ‘신새벽’에 가담했고, 조성만 열사의 추모 음반 [통일 그날로 다시 살아올 그대여!]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솔로 앨범 [템퍼러리 xxx 파일](1999)과 함께 솔로 음악인으로 더 많은 이들 앞에 설 기회를 만들었다. 이 작은 음반은 <시대>와 <주문>, <칼을 가시게>와 <조성만>, 그리고 <착한 사람들에게>처럼 훗날 ‘꽃다지’를 통해서도 계속 불릴 노래들을 빼곡하게 간직하고 있다. 정윤경의 홀로서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간다. 초기 ‘꽃다지’의 축이었던 유인혁과 민중음악계의 뛰어난 기타리스트인 고명원 등과 함께 ‘유정고 밴드’를 결성하여 [濫觴(남상)](2001)을 발표했다.
‘꽃다지’의 음악감독으로 영입된 2004년은 새로운 전기였다.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당부>와 <노래의 꿈> 등 좋은 노래들을 수두룩하게 만들어내며 무려 10년 동안 ‘꽃다지’를 지켜냈다. 일상에서 길어온 포크와 힘 있게 일어서는 록을 서정어린 시선과 진중한 음감으로 껴안으며 때론 <주문>을 걸고 때론 <당부>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나눠주던 정윤경이 또 다른 막을 열 채비를 하고 있으니 솔로 활동의 병행이다. 2012년 11월 30일과 12월 1일의 정윤경 콘서트는 마흔을 넘겨 연 첫 단독 공연이었고, 깜짝 등장한 유인혁이 노래하고 고명원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유정고 밴드’의 특별 공연까지 더해져 더욱 특별했다. 이제 콘서트 <동행>과 솔로 앨범 준비라는 계단 앞에 선 정윤경은 집에 은거하며 새로운 음악을 구상하고 있다. 본인은 손사래 칠지 몰라도 허술한 건 못 견디는 음악인이다.
소설가에겐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음악인에게는 자신이 부른 노래 주인공의 얼굴이 보일까. 누군가의 숨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귀한가. 정윤경은 여러 노래들을 통하여 남(타자)의 이야기를 나의 마음으로 만들었고, 그 노래를 다시 남(타자)에게 들려줌으로써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이러한 삶의 태도와 음악의 방식은 보편적인 예술의 정치성과 잇닿는다. 하지만 그는 치열하게 완성을 추구하는 음악가인 동시에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여린 남자였다. 사명감에 젖어 핏빛 혁명 담론을 설파하는 대신, 타고난 숙명인양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할 뿐이다. 얼마 전에 <조성만>을 듣던 그가 술 생각을 이기지 못했다지만, 죽음의 기억은 단지 패배의 기록은 아닐 것이다. 죽음은 살림이 된다. 죽음이 삶을 말하고 삶이 죽음을 죽인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리를 오가며 어떠한 사건 앞에서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머물러버리고 있는가. 공동의 목격은 책임을 분산시킨다. 또 우리에겐 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일도 적지 않다. 이럴수록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말에 되받아치는 예술가들이 있어줘야 한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이 일상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쓸 수 있는 길로 안내한다.” 4월 5일 밤, 정윤경은 황사에 뒤덮이고 경찰에 둘러싸인 대한문 앞에서 갑자기 마이크를 쥐더니 아무런 반주도 없이 <내가 왜?>를 불렀다. 그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음악인 중 하나이다.
▲시와. ⓒ콘서트 동행 기획단 제공 |
천천히,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있는 시와
마흔을 훌쩍 넘기고서야 솔로 활동을 준비하는 남자가 있고, 서른이 넘어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홍대 앞 작은 클럽에 나타난 여자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한 소녀는 커서 대학교 노래패에 가입했고, 만화영화 <짱구는 못 말려>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2006년 2월에서야 시작했다. 과함을 덜어내고 급류에서 비껴서 있기에 매력적인 노래, 채우는 대신 여백을 일부러 만드는 그의 음악을 자신의 귓바퀴 안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그리고 의외로 빨리 늘어났다.
시와는 [빵 컴필레이션 3](2007)에 노래를 싣고 미니 앨범 [시와,](2007)를 세상에 선보이며 적잖은 관심을 끌어당겼다. <화양연화>와 <길상사에서>는 주목할 만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시와의 노래 걸음은 자전거 페달을 밟듯 빨라졌다. 작은 것들과 짧은 순간을 보듬은 노래들을 담은 정규 앨범 [소요 逍遙](2010)는 소소함을 채취하여 울림을 이루었고, 두 번째 앨범 [Down to Earth](2011) 역시 계속 신호를 내보냈다. 또한 다큐멘터리 <오월애>(2011)의 음악감독을 맡아 OST를 발표하고, 유능한 기타리스트 Rainbow99(류승현)와는 듀오를 결성해 ‘시와 무지개’의 이름으로 [We are all together](2009)와 [우리 모두는 혼자](2011)까지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외침과 속삭임’이란 부제에 인디음악 동네의 여성 음악인들이 모여든 [이야기해주세요](2012)에서도 시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세련된 단발머리 인디스타로 변신한 시와는 독립레이블 ‘나무가 필요해’를 설립하고, 최근 자연을 위하여 플라스틱 음반을 생산하지 않겠다며 노래뿐인 음반인 [시와 커피](2013)를 발표했다. 이 음반의 콘셉트도 그렇듯 시와는 그간 음악인과 팬의 소통을 중시해왔으며, 이전의 앨범을 만들 때부터 팬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방식을 시도했다. 정윤경이 몸담고 있는 ‘꽃다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와 역시 종종 응달을 찾아 노래한다. 몇 해 전(그날도 4월이었다)에 만났을 때에 용산을 비롯하여 여러 의미 있는 곳에서 자주 노래한다고 운을 떼며 물었더니 시와는 거리와 현장에서 조용하기 짝이 없는 노래인 <길상사에서>를 부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히려 힘을 얻었다고.
지난 겨울, 어느 중학교에 특별 수업을 하러 가서 “특수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싱어송라이터가 된 사람”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눈을 반짝이며 듣던 여학생은 수업이 끝난 후에 내게 시와의 음반을 달라며 졸라댔다. 시간의 파도 속에서 팔을 휘저으며 살아가는 개인들에겐 때때로 시계가 멈춘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다시 시계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어떤 음악을 듣고 난 후, 시간이 전과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시와의 노래는 누군가의 작은 방, 사람들이 모인 거리, 노래를 좋아하는 또 다른 여학생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 우리의 동행
묘하게도 두 팔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상황에 따라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승리감의 표출이기도 하고 항복의 표시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벌을 받듯이 두 팔을 들고 있다. 예술인 대부분은 보수화한 기성 예술계처럼 국가의 보호(와 통제) 속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술만 추구하거나, 노래와 연주가 좋아 그저 노래와 연주만 갈고 닦거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남들에게 맡기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세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적당히 우물 안 개구리로 안전하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뱀 한 마리가 미끄러져 들어와 안식처를 지옥으로 바꾸기 전까진 말이다.
그것을 거부한 노동 문화와 진보 예술의 장은 축소되었고, 자본은 (노동자로서) 구성원을 배제하려 들지만 (소비자로서) 구성원은 어떻게든 포섭하고 있다. 경쟁 사회와 산업화는 거의 모든 예술을 기계화한다. 작품은 상품 가치로 평가받고, 음악인은 시장 이데올로기에 밀려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시장은 음악인의 생존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다. 그러나 억센 힘에 당겨 벌어진 손가락들 사이로 모래알들은 빠져나갔지만 작은 자갈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이 만나기 시작했고 동행을 준비한다. 출발이 달라서, 혹은 출발은 비슷했지만 길이 달라져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다. 원래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엔 이해하기 힘든 벽들이 많기 마련이다. 이때 관계 맺음은 그 벽을 넘어서는 사다리다. 동행은 벽돌들을 녹여내는 그릇이다.
바야흐로 프리퀼(prequel)의 시대. 본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속편들이 진보한 기술력과 커다란 자본의 힘으로 더욱 화려한 과거를 그려내듯, 이 세계는 미래가 취소된 자리에 이상한 과거가 자리를 잡곤 한다. 아니, 긍정적인 프리퀄을 찾아보자. 어떤 면에서 정윤경에게 시와는 과거일 수 있고, 솔로 음악인으로선 미래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시와에게 정윤경은 과거일 수 있고, 인생을 생각하면 미래일 수 있다. 그들이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저마다 지닌 목소리로 무대를 채우는 건 특별한 일이다. 덤으로 중요한 민중음악작가와 촉망받는 인디음악인의 협연을 통하여 우리 음악의 지금을 가늠할 수 있다. 둘 중 한 쪽만 알던 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다.
시와의 노래 <잘 가, 봄>의 이른 배웅을 받으며 봄날은 간다. 억지로 심어진 화단의 꽃들은 가을이 오기 전에 풀이 죽은 표정을 짓겠지만, 노란 꽃으로 봄을 알린 산수유는 가을이 오면 빨간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우리는 두 팔을 들어 올릴지도 모른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콘서트 동행 기획단 제공 |